1993년 베스트셀러 홍정욱의 '7막 7장' 회고. 초 단위로 공부하던 천재의 삶과 이에 박탈감을 느끼고 책을 찢어버린 90년대 학번의 이야기. 미국 유학 생활의 이면(애더럴, 대마초)과 연결해 '노력 신화'의 허상을 꼬집고, 중년의 마음챙김(Mindfulness)으로 나아가는 에세이.

[책 리뷰] 30년 전, 내가 홍정욱의 <7막 7장>을 발기발기 찢어버린 이유 (노력의 신화 vs 약물의 시대)
1. 90년대의 아이콘, 그리고 이모님의 선물
1993년, 대한민국 서점가를 강타한 책이 있었습니다. 바로 홍정욱의 <7막 7장>입니다. 30년 전쯤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유행에 민감하셨던 이모님이 저에게 이 책을 선물해 주셨죠. (한비야 님의 책도 그렇고, 이모님은 베스트셀러 수집가셨나 봅니다.)
책 속의 주인공은 완벽했습니다. 잘생긴 외모, 명문가 집안, 하버드대학교. 그는 깡통에 든 콩(통조림)을 퍼먹으며, 잠을 줄이고,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개어 공부했다고 썼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입시생들과 학부모들은 이 '초인적인 노력기'에 열광했죠.
2. 책을 찢다: "나는 개천의 용이 아니다"
하지만 저는 그 책을 몇 번 읽다가, 결국 발기발기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분노였을까요, 아니면 빠른 체념이었을까요.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저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해졌기 때문입니다. 그의 치열함은 대단했지만, 그 배경에 깔린 압도적인 문화 자본과 유전자, 그리고 환경은 '노력'만으로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습니다.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이미 저물고 있었고, 제 머리와 환경은 '용'이 될 재목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죠.
그 책을 찢어버린 날, 저는 역설적으로 자유를 얻었습니다. 남의 속도가 아닌 내 속도로 살기로 결심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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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국의 그림자: 초인적 집중력의 비밀?
세월이 흘러 2020년대가 되었습니다. 근황을 찾아보니 그 완벽해 보이던 주인공의 삶도 마냥 순탄치만은 않은 듯합니다. 자녀 문제 등 여러 구설수를 보며 "인생 참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싶습니다.
해외에 살며 미국의 대학 문화를 접하다 보니, 문득 30년 전 그 '초인적인 집중력'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갖게 됩니다. 미국 명문대 학생들 사이에서는 '애더럴(Adderall)'이라는 약이 공공연하게 거래된다고 합니다. ADHD 치료제지만,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게 해주는 암페타민 계열의 약물이죠. '공부 잘하게 해주는 약'으로 오남용되는 현실입니다.
심지어 어떤 주(State)에서는 대마초가 합법입니다. 집중력과 진정 작용을 준다는 대마초. 솔직히 50대 가장으로서, 가끔은 그 약물의 힘을 빌려서라도 머릿속을 짓누르는 잡념을 끄고 쉬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건 좀 부럽더군요.)
과연 90년대 우리가 동경했던 그 '잠 안 자고 공부하는 신화'는, 순수한 인간의 의지였을까요, 아니면 우리가 몰랐던 어떤 환경적 요인이었을까요?
4. 석용산 스님과 마음챙김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고 채찍질하던 홍정욱의 책을 버리고, 이제 저는 '마음챙김(Mindfulness)'을 이야기합니다.
한때 <여보게, 저승 갈 때 뭘 가지고 가지>라는 책으로 유명했던 석용산 스님. (물론 그분도 말년엔 논란이 있었지만...) 중요한 건, 남을 이기기 위한 '초 단위의 삶'이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한 '호흡의 삶'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지금도 제2의 홍정욱을 꿈꾸며 카페인과 약물로 버티고 있겠지만, 저는 찢겨 나간 책장과 함께 그 욕망도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그냥, 오늘 하루 내 몫의 삶을 묵묵히 살아내는 것. 그게 진짜 '7막 7장' 아닐까요?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옵니다. 그가 노벨상을 탔습니까, 아니면 퓰리처상을 받은 대문호입니까? 그는 그저 해마다 전 세계에서 수만 명씩 배출되는 '하버드 졸업생 중 한 명'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당시 대한민국은 그의 이야기를 마치 위인전처럼 떠받들었습니다. 서점에는 그의 책이 산처럼 쌓였고, 부모들은 자녀에게 그 책을 사주며 "너도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훈육했지요. 한 청년의 '유학 경험담'이 '국민 필독서'가 되었던 기이한 현상.
그것은 아마도 '학벌'이 곧 '인격'이자 '성공의 보증수표'라고 굳게 믿었던, 개발도상국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이 아니었을까요? 지금은 압니다. 하버드 간판이 인생의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그 간판 뒤에 숨겨진 그늘(마약, 경쟁, 우울증)이 더 짙을 수 있다는 것을.
30년 전, 그 책을 찢어버린 건 제 인생에서 가장 잘한 '손절'이었습니다. 남이 만든 위인전을 덮고, 비로소 나만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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