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동안 넷플릭스를 의미 없이 너무 많이 소비하는 것 같아 며칠간 과감하게 '금넷(넷플릭스 금지)'을 선언했었습니다. 하지만 마침 찾아온 근로자의 날 휴일 전야, 모처럼의 해방감을 만끽하기 위해 가벼운 마음으로 리모컨을 들었다가 의외의 숨은 진주를 발견했습니다. 바로 팽팽한 긴장감과 묵직한 스릴이 넘쳐나는 영화, <블랙 앤 블루(Black and Blue)>입니다.
🎬 1. 15분 만에 관객을 태우는 영화, <블랙 앤 블루> 리뷰
영화계에는 "초반 15분 안에 관객을 버스에 태워야 한다"라는 흥행 공식이 있습니다. 관객의 시선을 초반에 사로잡지 못하면 실패한다는 뜻이죠. <블랙 앤 블루>는 이 공식을 영리하게 증명합니다.
초반 주인공의 조깅 장면과 일상적인 순찰 근무가 이어질 때만 해도 '뻔한 볼거리 없는 영화 아닐까'라며 채널을 돌리려던 찰나, 영화는 관객이 이탈할 틈을 주지 않고 곧바로 거대한 사건을 터뜨립니다.
흑인 영화에 대한 선입견을 깨부수다
솔직히 그동안 흑인 주연 영화에 대해 '투머치 토킹(Too much talking)'이 가득한 기분 전환용 코미디거나 랩이 난무하는 장르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었습니다. 물론 윌 스미스 주연의 <나는 전설이다>처럼 진지하고 묵직한 명작도 존재하지만 말이죠.
하지만 <블랙 앤 블루>는 유머 릴리프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을 만큼 시종일관 진지하고 차가운 톤을 유지하며 선입견을 완벽하게 깨부숩니다.
- 나오미 해리스 (Naomie Harris): 처음 보는 배우였지만 거친 액션과 감정 연기를 훌륭하게 소화해 냅니다. 다만 감정이 폭발하는 장면에서 목소리가 성대결절처럼 심하게 쉬어 발음이 다소 뭉개지는 아쉬움은 남습니다.
- 타이리스 깁슨 (Tyrese Gibson): <분노의 질주> 시리즈에서 쾌활한 '투머치 토커'로 익숙했던 그가 이번에는 유머를 쏙 뺀 묵직한 거구의 캐릭터로 등장해 깊이 있는 연기력을 보여줍니다.
- 프랭크 그릴로 (Frank Grillo): <어벤져스> 시리즈에서 캡틴 아메리카와 맞서던 선 굵은 배우답게, 이번에도 살집 없는 단단한 체구와 날카로운 눈빛으로 부패 경찰 역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극의 서스펜스를 책임집니다.
보디캠에 찍힌 진실, 썩은 세상과의 사투
영화의 핵심 소재는 미국 경찰들의 삶의 일부분이자 필수 장비인 '보디캠(Body Cam)'입니다. 우연히 보디캠에 동료 경찰들의 마약 밀매 및 살인 현장을 녹화하게 된 신입 흑인 여경(나오미 해리스)은 순식간에 추격 대상이 됩니다.
현실과 타협하여 보디캠을 넘겨주더라도 목숨을 보장받을 수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 심지어 같은 흑인 사회에서조차 살인범으로 오해받아 고립되지만, 그녀는 끝까지 신념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결국 그녀의 처절한 투쟁은 파트너 경찰까지 변화시키며 범죄와 부패로 점철된 사회에 작은 희망의 빛을 밝히고 기분 좋은 결말을 맺습니다.
물론, 장르 영화의 역설처럼 '주인공 한 명을 구하기 위해 무수한 조연과 엑스트라들이 희생되는 구조'는 어김없이 반복되지만, 지나치게 자극적이지 않고 밸런스가 잘 잡힌 웰메이드 액션 드라마입니다. (IMDb 평점 6.3점이지만 몰입감은 그 이상입니다.)

📚 2. 인생학교: 우리가 '하지 않는 것'도 역사를 만든다
영화가 끝난 후, 저는 이와 결을 같이하는 책 한 권을 떠올렸습니다. 존 폴 플린토프의 <인생학교: 작은 실천으로 세상을 바꾸는 법>입니다.
우리는 종종 거대하고 부패한 현실 앞에서 무력감을 느낍니다. "세상을 바꾸는 건 불가능해"라며 결론을 내리고, 더 이상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는 채 냉소적으로 변해가곤 하죠. 하지만 저자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하는 것'뿐만 아니라, 불의에 동조하지 않고 '하지 않는 것'조차도 역사의 물줄기를 만든다고 말이죠.
"당신의 노력이 결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시도는 해봐야 한다. 적극적으로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역사 속 위대한 저항의 사례
책에서는 1973년 진 샤프가 정립한 '198가지 비폭력 저항운동 방법'을 소개합니다. 대중 연설, 청원 같은 소소한 행동부터 사회적 보이콧, 준법 투쟁, 심지어 단식과 연좌농성에 이르기까지 그 방법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베를린 중심가에서는 유대인 배우자들을 빼앗긴 비유대계 시민들이 뭉쳐 거센 공개 시위를 벌였습니다. 전쟁이 최고조에 달했던 서슬 퍼런 시기였음에도, 그 작은 연대와 저항은 놀랍게도 끌려갔던 배우자들을 집으로 무사히 돌려보내는 기적을 낳았습니다.
한때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일도, 막상 성공하고 나면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것처럼 보이게 마련입니다. 영화 속 주인공이 부패 경찰 전체를 상대로 보디캠 하나를 지키기 위해 달렸던 무모한 행동 역시 이와 같습니다.
✈️ 에필로그: 나만의 '헤지라(Hegira)'를 떠났던 이유
198가지 저항 행동 리스트 중 유독 제 눈길을 사로잡은 단어가 있었습니다. 바로 70번 항목: '항의성 이민(Hegira: 헤지라)'입니다. 위험이나 부조리한 현실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대이동(Exodus)을 뜻하는 말이죠.
돌이켜보면, 13년 전인 2013년 제가 한국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이곳 말레이시아로 무작정 현지 취업을 선택해 건너온 것 역시 나만의 '헤지라(Hegira)'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척박하고 답답했던 한국의 구조적 현실에 대한 나만의 작은 저항이었던 셈이죠. 재미있게도 제가 퇴사했던 한국의 전 직장은 1년 만에 폐업했고, 저는 지금 이 낯선 타국에서 식당을 운영하며 나름대로 꿋꿋하게 삶을 일구어가고 있습니다.
영화 <블랙 앤 블루>의 주인공처럼 거대 악과 맞서 싸우는 거창한 영웅은 아닐지라도, "무언가 심각하게 잘못되었다고 느낄 때, 더 이상 이 현실을 참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내 삶을 바꾸고, 나아가 세상을 바꾸는 저항의 위대한 첫걸음일 것입니다.
이번 주말, 썩은 세상에 통쾌한 보디캠 한 방을 날리는 영화 <블랙 앤 블루>를 보며 내 안의 멈춰있던 용기를 다시 한번 점검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