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프롤로그: 쪼그려 앉아 읽는 고전의 맛
며칠 동안 뭉친 빡빡한 다리와 관절을 풀며, 마당 한구석에 쪼그려 앉아 담배 한 모금을 빱니다. 그리고 손에 든 책은 <로빈슨 크루소>입니다.
어릴 때 동화책이나 문학 전집으로 읽었을 땐 그저 "무인도 생존기"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중년이 되어 원전(Original)으로 다시 읽으니, 이건 단순한 모험 소설이 아닙니다.
"인생을 탕진하고 깨달은 한 남자의 처절한 회고록"입니다.
2. 저자 다니엘 디포: 파산과 감옥, 그리고 글쓰기
저자 다니엘 디포(Daniel Defoe, 1660~1731) 형님의 인생부터가 드라마입니다.
메리야스 도매상, 정육업, 담배, 와인 무역 등 안 해본 사업이 없다가 31세에 파산하고 감옥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59세라는 늦은 나이에 이 걸작을 썼죠.
소설 초반에 나오는 주인공의 독백, "중산층의 삶을 살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뛰쳐나가 파멸을 자초했다"는 구절은 작가 본인의 뼈아픈 후회가 투영된 듯합니다.
71세에 빚쟁이를 피해 다니다 객사했다는 그의 최후를 알기에, 소설 속 문장들이 더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3. 로빈슨 크루소의 '멘탈 관리법': 불행과 다행의 대차대조표
무인도에 갇힌 절망적인 상황. 크루소는 미치지 않기 위해 장부를 씁니다.
왼쪽엔 '불운(Evil)', 오른쪽엔 '다행(Good)'.
| 불운한 사실 (Evil) | 다행스러운 사실 (Good) |
| 나는 무인도에 갇혀 절망적이다. | 하지만 나는 살아 있다. (익사하지 않았다) |
|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외톨이다. | 하지만 굶어 죽지 않았다. |
| 옷이 없다. | 하지만 여기는 열대지방이라 옷이 필요 없다. |
300년 전 사람도 이렇게 '감사 일기'를 썼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21세기를 살면서도 늘 불평불만인 우리에게, 크루소는 "행복은 먼 곳이 아니라, 관점의 차이에 있다"는 묵직한 팩트 폭격을 날립니다.

4. 종교와 노동, 그리고 인간
어릴 땐 몰랐는데, 이 책은 상당히 종교적(기독교적)입니다.
"고통으로부터의 구원보다 죄로부터의 구원이 더 큰 축복"이라는 문장은 나이가 드니 비로소 이해가 됩니다. 현실의 고통을 해결해 달라는 기도보다, 지난날의 과오를 씻고 싶다는 마음. 중년의 독자라면 공감하실 겁니다.
또한, 그릇을 굽고 염소를 기르는 그의 '노동(Labor)' 묘사는 경이롭습니다.
유튜브 채널 <Primitive Technology>를 볼 때 느끼는 그 원초적인 쾌감이 활자 속에 살아 있습니다. (300년 전 노익장의 필력에 감탄하게 됩니다.)

5. 에필로그: 넷플릭스 관계자님께
영화 <캐스트 어웨이>도 명작이지만, <로빈슨 크루소> 원작의 방대함과 디테일을 담기엔 부족합니다.
개인적인 희망으로, 넷플릭스에서 이 소설을 10부작 드라마로 만들어줬으면 좋겠습니다.
크루소의 고독한 내면 독백(내레이션)과 무인도에서의 처절한 생존 과정을 롱테이크로 담아낸다면, 오징어 게임 못지않은 대작이 될 거라 확신합니다.
추천: 삶이 힘들고 외로운 분들, 멘토가 없어 막막한 분들에게 이 300년 된 생존 지침서를 권합니다. Stay Sane!
구명보트 항해
바다로 나가고 싶다는 내 의향은 아버지의 의지, 아니 아버지의 지침과 너무나 상반되고 어머니나 다른 친구들의 온갖 애원과 설득도 너무 상반되었는지라, 이후 내 앞에 펼쳐진 비참한 삶으로 곧바로 이어진 내 본성적 성향에는 어떤 숙명이 내재해 있었던 게 아니었나 싶다.
아아! 그러나 올바른 일이라고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내가 그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은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었다.
무릇 성공과 번영이란 오용하면 종종 크나큰 역경의 원인이 되는 법이다.
나는 여전히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 고집불통 장본인이었다. 나는 장차 지독한 슬픔에 빠져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며, 스스로를 자책하며 살아갈 운명을 타고난 놈이었다.
그는 내가 품고 있는 계획은, 한편으로는 인생을 포기한 사람들에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점점 불어가는 막대한 재산의 소유자들에게나 맞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이런 일들이 내게는 너무 과분한 일이든지 아니면 나와 너무 어울리지 않게 천박한 일이든지 둘 중 하나이며, 내 신분은 중산층 혹은 흔히 불리듯이 하층의 상류층 신분이라고 말씀하셨다.
요컨대 어머니는 만약 내가 스스로를 파멸에 빠뜨리겠다면 내게는 그 어떤 도움도 없을 것이며, 두 분 께서 그런 일에 동의하는 일 또한 절대로 없을 것으로 믿어도 좋다고 말씀하셨다. 결국 어머니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내가 파멸에 빠지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아버지는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기꺼이 허락하셨다는 말이 절대로 내 입에서 나오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내게는 그저 새 농장에서 성공을 거두어 부유한 농장주가 되겠다는 소망을 버려두고 그저 상황이 허용하는 자연스러운 성공보다 더 빨리 성공하고 싶다는 경솔하고 무절제한 욕망을 좇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결국 나는 이런 욕망 때문에 인간이 빠질 수 있는, 그리고 인간이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목숨과 건강이 감당할 수 있는 가장 깊고 비참한 불행의 구렁텅이로 나 자신을 굴러떨어지게 만들고 말았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나를 불러라. 구해 주리라. 너는 나에게 영광을 돌려라.
사람들이 세상만사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된다면 고통으로부터의 구원보다 죄로부터의 구원이 훨씬 더 큰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뒤늦기는 했지만, 치러야 할 대가는 생각하지도 않고 또 내 능력을 올바르게 판단해 보지도 않고 덥석 일부터 저지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그제야 깨달았다.
현재 현실의 고통에서의 구원이 아닌, 과거에 저지른 죄의 구원이 훨씬 큰 축복이다는 내용인데요.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지난 과오들이 사진처럼 머릿 속에서 떠오르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죄를 씻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아직까지는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길 더 바라는 것 같습니다.
솔직하게, 저는 로빈슨 표류기는 읽은 지가 하도 오래 되서, 언제 읽었는지도 기억이 나지를 않습니다. 다만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조난을 당해 섬에 고립되면서 온갖 것을 직접 만들어 생활하는 점이 신기하기도 했고, 어린 시절 그런 것들이 부러웠나 봅니다. 아마도 어린이 '문학전집' 쯤으로 기억하면 될 것 같고, 몹시도 축약되면서 가벼워진 책이었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합니다. 그 당시에는 어린 나이에 뭔가를 만들고 배운다는 것이 좋아서 주인공 크루소가 직접 그릇을 만들고 자급자족하며 생존해 나가는 소설 속의 모습이 굉장히 신기하고 부럽기도 했던 것 같고 그래서 재밌게 읽었던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은 자신의 삶, 경험을 토대로 창작한 소설이며 노예 부림, 종교에 대해서 싫다는 독자를 꽤 많이 보게 되는데, 소설도 계속 좋을 수만 없다 영화도 좋은 장면만 모아 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한 자 한 문장 모두 주옥 같기는 어렵겠습니다. 그래서 종교, 종 부림 같은 장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거슬리지 않습니다.
크루소를 주인공이라 생각하고 읽어보면 또 다른 재미를 주는 것 같습니다.
사소하지만 나중에 녀석 때문에 아주 재미난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건 기회가 되면 그때 이야기하겠다.
탐사 여행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면 이야기하겠다.
나는 다른 많은 일들도 인내심을 갖고 온갖 노고를 다해 가며 완성했다. 정말이지 내가 처한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필수품은 모두 직접 만들어 쓸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자세한 내용을 다음부터 이야기하겠다.
그다음에 어떻게 했는지는 기회가 되면 이야기하겠다.
300년 전인 당시 58-59세의 저자인 디포는 이런 문구를 즐겨 사용합니다. 당시로써는 저자 자신이 '노익장'이라고 하더라도 상당히 많은 나이의 노인인데다가 의료도 현재처럼 발전한 시절이 아니기 때문에 몸도 마음도 '노쇠'했을텐데 저자의 정력과 창의성, 다방면의 경험 모두 놀랍습니다. 그럼으로써 실제 주인공이 이야기하는 효과를 줌으로써 사실성을 입히고 다음 장을 넘기게 하는 독자들의 욕구를 증폭, 유지 시키려는 용도로 적절하게 사용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셨으니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버린다 한들 그게 무슨 나쁜 일이며 뭐가 대수이겠는가? 거꾸로 온 세상을 다 가지고 있다 한들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을 잃어버린다면 그건 손실을 비교할 바가 아니지.
우선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은 우리에게 효용 가치가 있는 만큼만 좋은 것이지 그 이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하느님의 섭리가 체크무늬처럼 얽혀 있는 얼마나 기묘한 세공품인가! 인간의 감정이란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서, 혹은 알 수 없는 다채롭고 은밀한 샘물들에 의해서 얼마나 급하게 이리저리 떠밀려 내려가는가! 오늘 우리는 내일이면 우리가 증오하게 될 것을 사랑한다. 오늘 우리는 내일이면 우리가 회피하게 될 것을 찾아 나선다. 오늘 우리는 내일이면 우리가 두려워하게 될 것, 아니 그 두려움으로 몸조차 벌벌 떨게 될 것을 갈망한다.
나는 잡은 녀석들을 집어 든 후 영국에서 악명 높은 도둑놈들을 이용하듯이 녀석들을 이용했다. 말하자면 죽은 녀석들을 줄로 연결하여 높이 매달아서 다른 녀석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써먹었다.
깨진 조각이 불에 구워졌다면 분명히 그릇 통째로도 불에 구워질 수 있다는 소리였다.
불에 구워질 수 있다는 소리였다.
불운한 사실 (부정적인) 과 다행스러운 사실 (긍정적인)
구조될 희망이 전혀 없이 끔찍할 정도로 황량한 무인도에 난파되었다. 하지만 나는 살아 있다. 우리 배의 다른 모든 동료들처럼 물에 빠져 죽지 않았다.
나만 홀로 선택되어 사실상 온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참하게 소외되었다. 하지만 배의 모든 선원들 중에서 오직 나만 선택되어 살아남았다.
나는 인간들로부터 격리되고, 인간 사회로부터 추방된 외톨이다. 하지만 나는 굶어 죽지 않았으며, 이 황량한 장소에서 파멸하지도 않았고 자급자족할 능력이 부족하지도 않다.
내게는 몸을 덮을 옷가지가 없다. 하지만 나는 열대 기후대 지역에 와 있다. 옷이 있다 하더라도 이 곳에서는 입을 일이 좀처럼 없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행복찾기. 행복과 만족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현재 상황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 요즘으로 치면, 페이스북 속에서도 볼 수 있는 내용이며, 주인공이 현재의 상황를 비관과 축복으로 비교해서 테이블 형식으로 나열한 것을 보면, 당시 300년전에도 어쩌면 사람들은 "행복 느끼기", "감사 일기"를 하고 있었고, 지금 물질적으로 비교적 풍요로워진 시절에도 똑같이 행복 찾기를 그치지 않고 있으니, 신선한 공기와 깨끗한 물에 대한 고마움을 잘 잊어버리듯 언제든 곁에 있지만 그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것 같습니다. 300년 전에도 현실도 아닌, 소설 속에서 감사일기를 썼다는 것, 놀라울 따름입니다.